※ ※ ※ 그날의 하늘은 쾌청하게 맑았다. 나들이에 좋은 날씨였고, 사람들은 가족과 연인 등 끼리끼리 뭉쳐 추운 겨울날에도 힘차게 집 밖으로 향했다. 마침 그날은 왕국이 사랑하는 전사인 예니치카 님의 다섯 번째 무도대회가 시작되는 날인지라 모두의 손이나 주머니에는 줄을 서서 샀던 무도대회 티켓이 준비되어 있었다. 좌석을 급하게 늘리느라 좌석 주위에 기둥을 ...
※ ※ ※ 그날 이후, 프란시스는 정신이 나간 환자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예니치카의 곁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를 억지로라도 끌어내서 쉬게 하려던 시종들이나 병사들도 전부 포기했고, 그들도 왕자가 받을 충격을 이해하는지라 어느 순간부터는 말없이 프란시스를 도와 그가 손수 예니치카를 간호할 수 있도록 했다. 겨우 이런 것으로 보상될 것도 아니고 속...
※ ※ ※ “왕자님, 이제 허리는 괜찮으세요?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으….” 토할 것 같은 기분의 프란시스가 겨우 허리를 꺾고 앉을 수 있게 되자 수프 그릇을 든 시녀가 기뻐했다. 실려 올 때까지만 해도 반은 송장이었는데 사람들의 극진한 간호를 받은 프란시스는 이제 물도 마실 수 있게 되었고 목도 많이 나았다. 시녀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세 ...
※ ※ ※ “아, 리오다. 야, 나 왔다.” “…형!” 아브라함이 계단을 한 층 더 올라가자 뻥 뚫린 복도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의 막냇동생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불렀더니 리오라는 이름의 동생은 깜짝 놀라며 쪼르르 달려와 냉큼 형의 가방을 받아들었다. “너도 나보다 사탕이냐. 하긴, 사람이 중요하겠어? 당장 내 주머니에 들어가는 게 중요하지.” “...
※ ※ ※ 수도 안쪽의 저택지구에 자리한 발렌타인 공작의 저택은 아침부터 사람이 온다는 소식에 분주했다. 카펫을 새로 꺼내 먼지를 털고, 창도 새로 닦고, 바닥을 전부 물걸레질하느라 온 집의 고용인이 전부 동원될 정도였다. 그중 어떤 꼬마 하녀 하나는 높은 나무에 쌓인 눈을 털어내려 까치발을 들었다. 하지만 막대가 거기까지 닿지 않았다. 하녀는 그래도 자기...
※ ※ ※ 한편, 왕궁의 회의실에 앉은 자들은 클로드를 가운데에 두고 날개를 펼치듯 빙 둘러앉아 사고의 뒷수습을 맡느라 정신이 없었다. 급한 일이지만 왕자가 다쳤다는 문제이기 때문에 오늘의 회의장에는 오직 수석들만, 그리고 참가한 관료도 죄다 십 년 내로 늙어 죽을 것 같은 왕성의 최고 원로들로만 구성된 인원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왕자님이 평소에...
※ ※ ※ 안녕, 또 만났네. 소원대로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예니치카의 손에는 부케가 없었다. 약혼반지도 없었다. 새하얀 신부의 곁에 선 화동도 없고, 카펫도 하객도 없는 마른 초원 위에 그녀가 홀로 서 있었다. 예니치카를 발견한 프란시스는 헐레벌떡 달려가 그녀를 붙들었다. 평소에나 좀 이러지 그랬어? 자기. 내가 더 예뻐해 줬을 텐데. 난 적극적인 남자를...
※ ※ ※ 한편 같은 시각, 왕실의 새하얀 응접실에 선 현왕 클로드가 쥔 나비 무늬 잔이 가볍게 흔들리며 붉은 찻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명의 남자는 손수건을 꺼내는 대신 왕이 무어라 말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연회에 보냈다가 순식간에 나라의 미래를 잃을 입장이 된 클로드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이마를 짚다 쯧, 하고 혀를 찼지만 ...
※ ※ ※ 타타타- 바쁜 발소리에 눈을 뜬 유리벨라 공주는 덮고 있던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몸을 말아 자신의 존재를 숨겼다. 이곳은 수도의 왕궁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마련된 별궁, 지정된 몇 사람을 제외하면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허다한 유리벨라의 마지막 쉼터였다. 하지만 요 며칠간 모르는 사람들이 들이닥쳤는지라 유리벨라는 자신이 남들에게 다가가서...
※ ※ ※ 예니치카가 몸을 일으키자 밝아진 복도의 끝에 선 검은 망토의 남자 하나가 보였다. 차림새만 보아도 초대받지 못한 손님임을 알 수 있다. 저자가 다이앤을 죽였을 것이다. 남자는 잠시 예니치카를 쳐다보더니 그녀를 해치는 대신 등 돌려 다른 쪽으로 사라졌다. “뭐, 뭐야…?” 다이앤을 해쳤으니 그다음은 함께 있던 예니치카가 되어야 순서가 맞고, 예니치...
※ ※ ※ 환담으로 시끄럽던 홀을 벗어나니 놀라울 정도로 조용한 복도가 펼쳐졌다. 별관이 옆에 붙은 것도 아닌 겨우 저택 한 채지만 그레이스의 저택은 예니치카가 쓸고 다니던 대련장만큼이나 커다랗게 느껴져서 그녀는 이번에도 하녀의 뒤를 한참이나 종종걸음으로 걸어야 했다. “아야야….” 하녀를 뒤따르던 예니치카가 갑자기 발목을 문지르며 주저앉았다. 오늘을 위해...
※ ※ ※ 붉은 융단이 깔린 계단을 타고 다시 중앙 홀로 들어서자 예니치카를 발견한 사람들이 각자의 치맛자락을 들거나 가슴에 손을 대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 예니치카는 손에 든 검은 레이스 부채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고개를 살며시 숙여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왕국에는 여러 가지 인사법이 있어서 예니치카는 상대와 끌어안거나 어깨동무, 팔짱을 끼는 인사에도 능...
왕국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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